워킹홀리데이 #2 일상화의 오류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드니, #02 일상화의 오류.
4개월... 그리도 경계했건만, 결국 나는 일상화의 오류를 범하고야 말았다. 사실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 이 안락함에 휩싸여, 목적을 망각하고 그저 그런 '시드니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오늘, 굳게 다짐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모두가 그렇다. 처음 비행기에 오를 때의 그 각오는 그 어떤 풍파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만큼 단단하다. 열두 달에 열두 달을 더해 자신의 타국 생활을 계획하고,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한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어떠한 결과물과 가치를 가지고 돌아올지 또한 아주 장대하게 그림을 그리고 떠난다. 하루를 꼬박 날아 공항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땅에서 홀로 방을 구하고, 일을 구하고, 친구를 만들어 가며, 차근차근 내가 그려두었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초심, 초심이라 한다.
그러나, 하루 해가 저물면 돌아와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 차근차근 통장에 잔고가 쌓여가기 시작하고, 늘 다니는 길이 익숙해지고, 익숙한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어느덧 하루하루 특별했던 새로운 생활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서서히 목적을 망각하고, 초심이 흐려지고, '꼭 해야 한다.' 다짐했던 목록들이 아래서부터 하나씩 생략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한 번 정도' 란 명목으로 합리화되고 만다.
애를 써봤다. 나름 애써 봤음에도 나 역시 마찬가지로, 새롭고 특별한 환경 속에서 하나하나 굳게 다짐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것들이 서서히 일상화가 되어가며, 흐려지고 목적을 잃어갔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4개월 차, 시드니 생활에 완벽하게 일상화된, 서른하나에 이악 물고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한 나의 모습이다. 위기를 느꼈다. 이런 생활을 지속한다면,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내게 시간 낭비일 뿐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다면 나에게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늦은 나이에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도망 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새벽같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한국에서도 종종 너무 복잡하거나, 마음을 다잡고자 할 때는 캄캄한 밤에 도봉산을 올라 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곤 했다. 그래서 캄캄한 밤 시드니 시티에서 버스를 타고 40분가량 달려, 수평선이 내려다보이는 해안가 절벽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 통장에 입금하기 위해 분명 가방에 넣었던 $1,650불 중 $1,500불이 사라지고, $150불만 남아있다.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곳의 12주치 방 값과 맞먹는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나태하고 게을러진 스스로에 회의감이 들어, 새롭게 다잡고자 아침 햇살을 맞이하러 왔는데 가진 돈의 절반이 사라졌다. 혹시나 서랍에서 모두 꺼내지 않았던 걸까. 버스에서 잠깐 잠든 사이 누가 소매치기를 했나. 내가 어디선가 흘려버린 건가. 복잡하던 머릿속이 더욱더 복잡해진다.
내 방안 책상 서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정말 좋겠다만, 이미 내게 일어나버린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면, 빨리 받아들이고 냉정해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너무나 괴롭고 힘든 시점에서 일어난, 더욱이나 괴롭고 힘든 일이기에 당장 털어버리지 않으면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가진 돈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침착하게 스스로를 달랜다.
혼자서 생각하고 되뇌었다. '어쩌면 내가 '내일은 아침 일찍 해를 보러 가야지' 하고 다짐했던 어젯밤부터 예정되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마음을 다잡고자 했다면, 확실하게 정신 차리라고, 하늘에 내가 채찍질을 했나 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씩 하나씩 다시 시작하자. 잔뜩 계획해서 왔던 것 들 중 과하다 싶은 것들은 모두 지워 버리자. 욕심을 버리고,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몇 가지만 확실하게 해서 돌아가자. 어차피 그 돈은 내 돈이 아니었던 것이고, 이 일을 계기로 초심을 찾을 수 있다면, 충분히 그 정도 대가는 합리적으로 치른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싶기도 하고, 이미 잃어버린 돈이라 마음은 정리했지만, 그래도 내가 실수로 $1.650불이 아니라, $150불만 가방에 넣은 것이길 바랐다. 책상 서랍을 당겼을 때 나머지 $1,500불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으면 좋겠다.
크게 한번 한숨을 내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간다. 현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있을 리가 없어', '없어도 실망하지 말자', '서랍을 열고나면,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해야겠다'라고, 이미 혼자서 잃어버린 돈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런데...
그런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혼자서 너무 완벽하게 현실을 수용해 버린 탓인지 뛸 듯이 기쁘지도 않았다. 공돈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지금부터 라도 독하게 정신 차리고 살라며, 신이 내게 따끔한 충고를 남긴 듯한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야겠다며, 꼭두새벽부터 이 생활에 대한 회의감에 휩싸여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순간부터, 가방에서 $1,500불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던 순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합리화 시키며, 집으로 돌아오던 순간, 그리고 서랍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돈을 확인하고 난 지금까지. 단 두 어시 간 동안 머릿속에 엄청난 폭풍이 몰아치고 간 느낌이다.
다시금 일상에서 벗어나려 애써 볼 생각이다. 흐릿해지고 있던 초심, 내가 호주행 비행기에 오를 때 가졌던 그 마음가짐을 다시 일깨운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허탈하게 웃어보았다.
[네이버 이봉근 여행블로그 insta@lee_traveller]